불확실하고도 확실한
김홍주 개인전 <어딘가의 풍경>에서 그물망 속 김홍주의 초상은 한 화면에 여러 겹의 이미지를 교차한다. 대지와 함께 요동치
는 인간은 양자의 긴밀한 관계를 말해준다. 그에게 자연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작업을 시작하게 하고 이끄는 동력일 따
름이다. 전시는 이것저것이 한데 모여있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풍경의 속성을 활용한다. 그의 풍경은 어디인지를 확정하지
않는다. 무엇도 누구도 확실하지 않다. 불확실한 것을 자세하게 그린다는 것은 역설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한 도전적 태도이자
피상적으로 고정되는 이미지에 대한 불신이다. 화가의 불신은 다소간 분명해 보이는 것이 이질적인 것으로 꿈틀꿈틀 변형되
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만져질 듯 실감 나는 것이지 본 것을 확증하는 것은 아니다. 김정은(미술평론가)은 그의 작
품을 “세필이 캔버스 천 표면의 올 하나하나에 부딪힐 때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면서, 그 접촉을 표현하는 촉지적 회화”라고
평가한다.
김홍주의 작품은 그림에 또 다른 그림이 있다. 모더니즘의 이상처럼 한눈에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는다. 여러 이국적인 건물과
글자가 자유롭게 배치된 작품에서 산과 강은 에로틱하게 얽힌 인체로 변모한다. 여러 도상의 스티커를 떼어 자유롭게 다시 붙
이는 아이의 놀이처럼 비어있는 곳에 적당한 이미지를 끼워 넣는다. 그것은 르네상스 원근법이 확립되기 이전의 지도나 동양
화의 다시점과 비슷하다. 물론 그 지도의 모델은 현대의 것과 동일한 기호적 지도가 아니라, 미지의 장소와 괴물들도 우글거리
는 그림지도이다. 창자나 그 안의 배설물을 떠올리게 하는 덩어리는 몸의 안과 밖을 동시에 풍경화한다. 세필로 자세히 그렸지
만, 동시에 화면 아래에 흘러내리는 물감들은 그것이 화가의 진액을 빼내서 생산한 것임을 말한다. 이러한 흐름은 중층적 화면
에 무슨 색이 사용되었는지를 스펙트럼처럼 펼쳐 보인다. 잎의 실루엣을 가진 거대한 형상은 그 내부가 생략되어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재현의 역사는 그림자에서 거울로 그 모델이 이동함으로써 타자보다는 동일자가 강조됨을 보여준다.
그는 무언가를 자세히 그리면서도 눈 밖의 이질성으로 끝없이 탈주한다. 꽃이나 잎이 크게 그려진 것은 한 시인이 모래알에서
우주를 본 것과 같은 차원이다. 꽃 한 송이 이파리 한 장은 수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의 연속인 작업 선택지의 보고인 셈이다.
둥근 물방울로 연상되는 푸른 얼룩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수많은 흐름이 있으며 그려진 그림임을 잊지 않도록 흘러내리는
물감도 있다. 김홍주는 배설물을 많이 그렸다. 온 힘을 잔뜩 주고 내보내야 하는 똥은 유기체가 원활하게 살아가는 데 필수적
이다. 자신이 먹은 것을 완전히 소화해서 밖으로 내놓은 것, 그것이 타자로 이루어진 동일자가 타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방식이
다. 누렇게 변색하기 시작하는 푸른 이파리 한 장에는 수많은 길이 연결되어 있다. 여백 같은 빈 배경에 뚫려있는 길(잎맥)은
있음과 없음, 생과 사, 생성과 소멸 사이의 문턱을 낮춘다. 누렇게 변색한 이파리에는 힘든 배변과 광배를 두른 부처상이 동시
에 보인다. 미시와 거시의 관계처럼 비천함과 숭고함이 자연 형상 안에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글: 이선영